외암 이간선생

500년 역사의 살아있는 민속박물관 아산외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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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이간 선생

1. 외암 이간의 생애

외암(巍巖) 이간(李柬, 1677 ~ 1727)은 외암마을의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인물이며, 자는 공거(公擧), 호는 외암·추월헌(秋月軒)이며, 외암리 예안이씨의 입향종 이사종(李嗣宗)의 5세이다. 구전에 의하면 이간은 마을 내 건재고택(建齋古宅)에서 태어났으며, 회덕현감(懷德縣監)으로 제수된 1년 여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일생의 대부분을 외암마을에서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이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받고 경세를 논하고자 하는 당대의 많은 문인들이 언제나 마을을 찾았다.

간의 생부는 이태정(李泰貞, 1646 ~ 1707)인데 백부인 이태형(李泰亨, 1632 ~ 1717)에게 양자로 갔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4세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10세 때에는 서울에 거처하면서 본격적으로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 때 같이 배운 이로는 기원 어유봉(杞園 魚有鳳, 1627 ~ 1717)이 있었다. 15세(1691)에는 숙부의 임소(任所)인 자산(慈山)으로 따라가 계속 수학하였는데, 이 때 임소의 문루 현판에 글을 게시하자 그의 필법을 보고 감탄하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20세(숙종 22년, 1696)에 파평윤씨 윤헌의 딸과 혼인하였다.

27세(숙종 29년, 1703)에는 예산에 있던 신유(申愈, 1673 ~ 1706)와 대전 진잠에 거주하던 신경(? ~ 1708)을 찾아가 도(道)를 논하고, 30세(1706) 때에는 윤혼(尹焜, 1676 ~ 1725) 및 10여 인의 지기들과 광덕산 상류 용추에 놀러가 시를 짓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간의 7세손 이용헌(李用憲)에 따르면 당시 이간과 윤혼, 신유, 신경, 현상벽(玄尙壁), 한홍조(韓弘祚), 최징후(崔徵厚), 이하병(李夏炳)의 8학자를 ‘호중팔학사(湖中八學士)’라고 하였다. 이후 수암 권상하(遂菴 權尙夏, 1641 ~ 1721)의 문인이 되고 난 후에는 한원진, 윤봉구, 채치홍, 이이근, 현성벽, 최징후, 성만징과 함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로 더 잘 알려졌다. 외암 이간의 학맥은 이이-김장생-김집-송시열-권상하로 이어지는 서인-노론의 율곡학파이다. 이간은 18세기 이후 기호학파 내에서 100여 년 이상 지속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同異)에 관한 논쟁에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단초를 개척한 학자였다.

이간은 당대의 손꼽히던 성리학자들을 찾아가 학문을 논하였는데, 1706년 겨울에는 사천에서 김간(金幹, 1646 ~ 1732)을 만났고, 서울로 올라가 한수(漢水)에서는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형제와 도를 논하고 돌아왔다. 31세 무렵에는 여전히 학문에 부족함이 있다고 여겨 제천 황강의 상류에서 강학하던 수암 권상하를 찾아갔다. 이듬해 이간은 윤혼과 함께 외암리에서 수목이 울창한 계곡의 소[용추] 옆에 외암정사(巍巖精舍)를 지었고, 이에 권상하가 관선재(觀善齋)의 편액을 보내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간의 됨됨이를 알아본 권상하는 ‘추월헌(秋月軒)’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자신 역시 ‘한수재’라는 호가 주자의 시 [재거감흥(齋居感興)] 중 ‘추월조한수(秋月照寒水)’에서 따왔음을 밝혔다.

이간은 숙종-영조 대에 ‘호서사인(湖西士人) 중 등용할 만한 인물’로 자주 추천되었다. 숙종 36년(1710)에는 순무사 이만성(李晩成)이 조정에 올리는 계문에 34세의 이간을 언급하면서 ‘경학명세(經學名世) 하니, 이조에 명하여 그를 장려한 후 등용케하여 학자들이 이에 권면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고, 숙종 39년(1713)에는 영의정 이유(李濡)의 추천이 이어졌다. 그리하여 36세(1712) 때 장릉참봉에, 39세(1715)와 40세(1716) 때 두 차례에 걸쳐 세자시강원 자의(諮議)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숙종 43년(1717)에도 종부시정에 제수되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 영조 1년(1725)에 49세의 나이로 회덕현감에 제수되었다. 이간이 회덕현감에 부임하면서 영조에게 사조(辭朝)하자 영조가 직접 ‘학문하는 요점’을 묻고는 이처럼 강학(講學)하는 사람을 얻기는 매우 쉽지 않다고 하며 올라와 강학할 것을 기약하였다. 이간은 회덕현감에 부임한 후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인한 백성들의 원성이 있자 전정(田政)과 군정(軍政)에 관한 개혁안을 마련하여 충청도 관찰사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곧바로 사임했다.

영조는 이 해에 이간을 경연관으로 초계하였으나, 이 또한 자신의 기력이 쇠하여 응하기 어렵다고 상소한 후 사직하였다. 이후 2년 사이에 충청도사(忠淸都事)에 제수되었고, 또 여러 차례 영조가 불러 함께 경연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다가 영조 3년(1727) 세상을 떠났다. 이간이 51세의 나이로 외암마을에서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예관(禮官)을 보내 장례물품을 하사하고 치제(致祭) 하였다.

영조 36년(1760)에는 이간이 세상을 떠난 지 33년 만에 둘째 아들 인계 이이병(麟溪 李頤炳)이 부친의 글을 모아 『외암유고(巍巖遺稿)』 (16권 8책, 목판)를 간행하였고, 순조 2년(1802)에 문정공(文正公)이라 시호를 받았으며, 이간이 윤혼과 함께 강학하던 관선재(외암서사)에 위패를 봉안하여 향사하게 하였다.

2. 인물성동이론과 외암 이간의 학맥

조선시대 철학사상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조선의 성리학은 그 전개과정에서 특징적 형태를 보여주었다. 그 가운데 성리학자들이 성리학을 이념의 정통으로 삼기 위해 다른 사상을 비판하고 배척한 것은 무엇보다 커다란 특징이다. 이른바 도통론이나 정통이단론이 그것이다.

다음으로는 조선의 성리학이 자체 내의 이론적 논쟁을 통하여 조선성리학의 특성과 독자적 발전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성리학 이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대부분 이와 같은 내용이다. 특히 성리학 자체 내의 이론적 논쟁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조선성리학을 대표한다. 이러한 성리학 자체 내의 이론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주제들은 몇 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인물성동이론은 사단칠정론과 더불어 한국 성리학의 대표적인 철학논쟁이었다.

한국유학사에서 16세기는 성리학의 전성기로서 사단칠정(四端七情), 인심도심(人心道心), 본연지성(本然之性), 기질지성(氣質之性) 등 인간의 심성문제 탐구가 철학의 주된 관심사였다. 따라서 16세기 성리학은 천(天)과 인(人)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주로 논의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천과 인의 관계에서 나아가, 인간과 사물[동식물]의 관계로 관심이 옮겨지게 되었다. 즉 인간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 주요 논쟁으로 떠오른 것이다.

인물성동이논쟁은 일종의 보편·특수의 논쟁으로 정자(程子)·주자(朱子)의 이일분수(理一分殊)나 율곡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에 근거하고 있다. 즉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을 놓고 이일분수나 이통기국의 논리를 적용했을 때 생기는 동일성과 차이성의 문제이며, 이통(理通)의 관점과 기국(氣局)의 관점,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관점에 따라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같다고도 할 수 있고 다르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논쟁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이 바로 이간과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 1682 ~ 1751)에 의해서였다. 이간과 한원진이 벌인 논쟁 초점은 결국 본연지성(本然之性)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있었다. 이간은 이 본연지성을 이일지리(理一之理)로 보아 인(人), 물(物)의 보편성을 주장하고, 한원진의 본연지성을 이기묘합(理氣妙合)으로서의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보아 인·물의 차별성을 주장하였다.

우리가 주목하는 이 인물성동이논쟁은 조선조 3대 학술 논쟁 중 하나로 이 논쟁이 충청수영(忠淸水營, 현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서 이루어진 것은 숙종 35년(1709. 4.)의 일이었다. 당시 이간, 한원진, 최징후, 한홍조, 윤혼, 현상벽, 우세일, 최안후, 윤형, 이하병 등은 충청수영성 한산사(寒山寺)에 모여 열띤 강론을 하였다. 이 강회(講會)는 이간 측에서 주관하고 한원진에게 편지를 보내어 초청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간은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하여 4월4일 윤혼과 함께 예산을 출발하였다. 당시 이간은 조부 이박(李璞)이 현종 1년(1660) 충청수사를 역임하였던 인연이 있었고, 당시 친분이 있던 수군절도사가 배를 내주어 명승지인 영보정(永保亭)에 올라 강해(江海)를 구경하고, 한산사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각자 인사를 나누고 차례대로 주제를 제출하여 토론에 들어갔다. 최징후도 와서 강론에 참여하였고, 이 때 최징후의 동생 최안후도 함께했다.

한원진의 연보에 의하면 이날 토론에서 이간과 한원진은 미발(未發), 태극(太極), 오상(五常), 충막무진(冲漠無眹)에 대한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고, 역학(易學)의 8괘(八卦)에 대한 강론에서는 윤혼과 우세일이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 밖에도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한 논의도 있었는데, 이 모임에서 이간은 한원진과 자신의 학설이 끝내 합일되지 못함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간은 이 모임을 마치고 돌아와 무려 1,800언(言)에 이르는 5언 장편시 「한산기행(寒山紀行)」을 지어 자신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거듭 피력하였다. 이 모임에서 토론 된 호락논쟁(湖洛論爭)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이간은 모든 존재가 ‘천명’으로 가진 ‘공통의 이(理)’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이통(理通)’을 내세웠다면, 한원진은 현실 존재들이 ‘기질’의 차이에 의해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진다는 점을 중시하여 ‘기국(氣局)’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 이간은 모든 존재의 ‘근원적 동일설’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인간과 동물은 모두 ‘태극’과 ‘천명’을 동일하게 품수하여 ‘오상’을 똑같이 갖추고 있으므로 인(人)·물(物)의 본성은 동일하다고 보았다. 또한 ‘미발’시의 의식 상태는 아직 기질(氣質)의 영향을 받아 이전의 ‘근원적 순수성’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순선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한원진은 현실 존재들의 다양한 차이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인간과 동물은 각기 그 품부 받은 기질로 인하여 서로 다르다고 보고, 인간의 ‘미발’심체도 이미 기질의 영향 속에 놓인 것이므로 선할 수도 있지만 악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100여 년간에 걸친 논쟁이 기호학파 내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이간이 제시한 인물성동론은 주로 서울에서 활동했던 도암 이재(陶庵 李縡, 1680 ~ 1746), 여호 박필주(黎湖 朴弼周, 1776 ~ 1852), 미호 김원행(渼湖 金元行, 1702 ~ 1772) 등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1651 ~ 1708)과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 ~ 1722) 계통을 잇는 학자들이 심취했고, 한원진이 제시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은 병계 윤봉구(屛溪 尹鳳九, 1681 ~ 1767), 봉암 채지홍(鳳巖 蔡之洪, 1683 ~ 1741), 매봉 최징후(梅峰 崔徵厚) 등 호서지방의 권상하 문인들이 중심으로 따랐다. 이들의 논쟁을 ‘호락논쟁’이라고도 하는데 한원진의 인물성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주로 호서지방에 많았으므로 ‘호론(湖論)’이라하며, 이간의 인물성동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서울에 많이 살고 있어 ‘낙론(洛論)’이라 하였다.

호락논쟁은 단순한 이론논쟁으로 그치지 않고 이후 사상계의 재편을 가져왔다. 인물성동론을 주장했던 낙론은 심성위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물론(物論)을 성립시킴으로써 자연관의 변화, 경제지학(經濟之學), 상수학(象數學) 등에 관심의 증대를 가져와 이를 기반으로 북학(北學)이 형성되었으며, 인물성이론을 주장했던 호론은 존주론(尊周論)과 존화론(尊華論)으로 이어졌다.

3. 평생지기 윤혼과의 교유

전술한 바, 이간은 당대 ‘호중팔학사’이자 ‘강문팔학사’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서, 당대의 석학들과 다양한 인맥·학맥을 형성하였다. 이 중에서 이간의 『외암집』에 자주 등장하는 천서 윤혼(泉西 尹焜, 1676 ~ 1725)과는 지척(역촌)에서 학문적 교류와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었다.

윤혼의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외암마을 예안이씨 입향조 이사종의 장자 이륜의 사위 윤근(尹根, 1574 ~ ?)의 현손이며 이간과는 인척지간이다.

윤혼은 이간과 함께 숙종 33년(1707)에 청풍 황강서원에 가서 권상하의 문하로 들어가 『대학(大學)』의 의의(疑義)를 논하면서 권상하로부터 학문이 높음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윤혼은 그 뒤 신경, 한원진, 현상벽 등과 교유하면서 호중팔학사의 한사람으로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 그리고 1709년에는 인물성동이논쟁에도 가담하여, 이간과 함께 ‘인물성동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고 그 해 이간과 함께 권상하를 따라 화양동에 들어가 만동묘(萬東廟)의 향사(享祀)에 참여하였다.

운혼은 이간과는 달리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1714년 소과에 합격하였으며, 1719년에는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명릉참봉(明陵參奉)이 되었고, 그 해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관직이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정언(正言)·지평(持平)에 이르렀다. 『문과방목(文科榜目)』 에는 윤혼의 거주지가 진천과 온양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그는 외암마을에 잠시 머물다가 이웃한 역촌리로 옮겼거나, 또는 처음부터 그곳을 세거지로 잡은 듯하다. 이간의 『외암기』에도 그[외암마을 반계] 서쪽으로 역말 수 십 백호가 늘어서 있어서 한 눈에 바라보이는데 물 가까운 곳에 소나무 숲을 이룬 곳이 내 모임의 벗인 윤회보(尹晦甫 : 윤혼)가 사는 곳이다.

(其西驛村數十白戶 綿亘一望 而近水第一松篁 卽余社友尹晦甫居也 以其水有磐 故近名以磐溪) 라 하였다. 이간의 문집에는 이처럼 윤혼과의 교유에 대하여 다양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외암마을의 용추(龍湫)는 그들이 자주 찾아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했던 공간이다. 이간이 윤혼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용추폭포를 보다가 비를 피해 바위굴에서 지은 다음의 시는 당시의 정경과 생각을 공감할 수 있는 자료이다.

바람 이는 십곡(十斛)의 샘에 수렴(水簾)이 걸려있는데
온 산에 구름 일어 거센 비 쏟아지네
암혈에서 삶을 마치리라는 평소의 계획
한나절을 흠뻑 젖고 나서야 도리어 알게 되네.

윤혼은 이간과 학문적 관점을 공유하기도 하였는데, 『외암유고』 에 이간이 윤혼에게 보낸 서간 3건에 인물성동론에 대한 토론이 실려 있다. 또한 윤혼이 이간과 함께 외암정사를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함으로써 온양 지역의 유학을 진흥시켰다. 팔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인 윤봉구 역시 이간과 윤혼이 외암마을에서 함께 강학했음을 기록하였으며, 이간의 문집에 나오는 아래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직 한 명의 회우(晦友, 윤혼)가 있는데, 그와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인척관계를 맺어 서로 더불어 같은 서당에서 크고 작은 일이 있으면 의논하여 처리하곤 했다. 그는 평상시 기미(氣味)는 순박 진중했고, 승낙을 할 때 구차한 것이 없었다. 그 그릇은 매우 두텁고 식견은 매우 넓었다. 옛 사람의 이른바 ‘벗하며 스승으로 삼을 만한 자가 얼마이겠는가?’ 라고 했는데 다행이 나에게 그런 친구가 있는 즉 나는 비록 고루하고 아는 것이 없지만 어찌 가히 끝내 계합하지 못함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 『외암유고』 중 「외암기」 이상을 통해 보면 이간은 윤혼에 대해 친구이자 한편으로는 스승으로서 존경할 만한 식견과 인품을 소유한 인물로 극찬하고 있다. 자신이 도움을 요청하면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기꺼이 승낙하는 그런 지기가 윤혼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725년 윤혼이 앞서 세상을 떠나자 지은 제문에는, 자신과 윤혼을 춘추전국시대의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에 비유하고는 ‘이제 더 이상 지음(知音)의 귀는 없어라’라고 하며 크게 애통해 하였다. 순조 16년(1816)에 후학 기호유생들에 의해 외암서사가 다시 창건되고 이간과 윤혼이 제향되었다. 또 고종 26년(1889)에도 당시 도제조 심순택이 이간의 행적을 칭송하고 아뢰어 비로소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