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특징

500년 역사의 살아있는 민속박물관 아산외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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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특징

1. 마을의 입지와 자연환경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마을은 외손봉사(外孫奉祀) 관행과 조선후기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호서사림파의 학맥을 계승한 외암(巍巖) 이간(李柬, 1677 ~ 1727)의 출생지로 유명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16세기 중반에 기원하여 예안 이씨 종족마을로 진화한 전형적인 반촌(班村)이다. 마을에는 대종가와 소종가를 비롯해 정려, 신도비, 정자, 선산, 서원, 풍수적 경관 등 반촌을 상징하는 다양한 경관 요소들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외암마을은 전통 건조물 보존지구(1988.)로 정해졌고, 국가민속문화재 제236호로 지정(2000. 1. 6.)되었으며 오늘날 충남 지역을 대표하는 민속마을로 보존되어 있다.

외암마을의 동구(洞口)에는 반계(磐溪)라는 개천이 흐르는데 반계 건너편에는 역촌(역말)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역촌은 조선시대에 시흥역(時興驛)이 설치되어 있었던 곳으로 현재는 아산시 송악면의 면소재지가 되어 있다. 외암마을은 동구 밖에 계류(溪流)와 넓은 들판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느 반촌처럼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유형으로 상당히 풍요로운 물질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으나, 방위의 측면에서는 동쪽에 산을 등지고 서쪽으로 하천 및 들판을 대하는 형국으로 한반도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반촌 입지형과 매우 다른 입지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외암마을은 주산(主山)인 설화산(雪華山)을 마을 동쪽 편에 두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가옥들이 설화산 서쪽 혹은 서남쪽 산록부에 분포하게 되어 있다. 이로 인해 방위상 북서 계절풍에 전면적으로 노출되는 입지를 취하고 있는데 북서풍에 노출된다는 것은 효과적인 난방에 불리하고 화재의 위험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을 주민들은 불리한 자연 조건에 적응하고 열악한 부분을 비보(裨補)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경관들을 마을 안팎에 조성하고 특정 장소들에 대해서는 개인적, 집단적 차원에서 종교적 의미와 상징적 가치를 부여해 왔다. 특히 불리한 자연환경 조건에 적응한 인문 경관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옥의 평면구조와 좌향, 마을을 관통하여 흐르는 물길, 그리고 마을 곳곳에 조성된 크고 작은 숲과 정원수들이다.

외암마을의 가옥구조는 대부분 ‘ㄱ’자(字)나 ‘ㄷ’자 형태를 보이며, 이들이 서로 조합되고 여기에 다시 돌담이 결합되어 거의 ‘ㅁ’자 형태를 취함으로써 난방에 매우 효과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주요 간선도로는 크게 안길(중앙 골목길)과 외곽도로의 두 갈래로 이루어져 있다. 안길은 마을입구에서 외곽도로로부터 분기되어 그것이 거의 평행을 이루면서 마을을 관통한 다음, 마을 동쪽 끝 부근에서 다시 외곽도로와 합쳐진다. 외곽도로는 마을 남쪽에 있으며 마을입구로부터 남쪽 천변을 따라 설화리로 이어진다. 외암마을의 가옥들은 대체로 이 두 개의 간선도로 혹은 이들의 지선을 향하여 대문을 낼 수밖에 없으므로 가옥의 좌향은 자연스럽게 남서향 혹은 남향을 이루게 되어 겨울철 난방에 유리하다.

외암마을은 마을을 관통하여 흐르는 수로가 구비되어 있다는 것이 큰 특징으로, 이 수로의 수원지는 설화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이다. 계곡물은 설화산에서 발원하여 마을 남쪽 외곽도로를 따라 흘러나가는데 그 상류를 막아 용수로를 개설하였고 이것은 마을 안의 여러 가옥들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 몇몇 양반가들은 이 용수로를 이용하여 생활용수를 충당하거나 연못과 정원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용수로의 가장 긴요한 쓰임새는 방화용수(防火用水)로써의 역할이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이 용수로의 의미에 대해 일부 풍수지리가들은 화산(火山)으로 인식되는 설화산의 화기(火氣)를 제어하기 위해 조성되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몇몇 조경학자들은 인공적인 용수로가 마을을 관류하며 공통적으로 수경을 연출하는 경관은 매우 희귀한 사례이며 외암마을의 조경 중 특기할 만한 요소라 평가하고 있다.

외암마을의 경관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마을 안팎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숲과 정원수이다. 그 예로 마을 입구에 조성된 소나무숲과 몇몇 양반가에 조성된 정원수 그리고 설화산으로부터 외암 이간 선생 묘소까지 이어지는 능선부의 숲을 들 수 있다. 한국 태안반도나 일본 토나미 평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넓은 저평지에 입지한 산촌(散村) 지역에서는 강한 바람과 그로 인한 연쇄 화재를 막기 위해 개별 가옥의 울타리에 방풍림 또는 방풍수를 조성한 사례가 있다.

이로 미뤄보아 북서 계절풍에 전면 노출된 외암마을의 경우 마을 안팎에 조성된 다양한 종류의 숲 역시 같은 시각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중에서 설화산과 이간 선생 묘소를 잇는 능선상의 소나무숲은 마을의 우백호로서의 풍수적 상징성을 부여받으며 지형상 불리한 마을의 입지를 비보(裨補)하고, 마을 북쪽에 위치하여 실질적인 방풍 기능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마을입구의 소나무숲과 개별 가옥의 정원수로 가꿔진 노송들은 여기에 보충적으로 작용하면서 보다 미시적인 공간 규모에서 방풍 및 연쇄 화재 방지, 나아가 일상생활의 심리적 안정에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마을의 경관 변화와 상징 경관들
1) 종족마을의 형성과 경관 변화

우선 외암마을의 공간구조에서 있어서 핵심지를 어디로 볼 것이냐가 관건인데 조선시대 반촌의 일반적 공간구조를 염두에 두고 외암마을의 형성과정을 추론해 본다면 종가를 기준으로 삼아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그리고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전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불어 현재 보존되고 있는 고택의 건립 시기 및 택호를 통해 본 그 정치·사회적 지위를 참고한다면 예안이씨 종족마을로서 외암마을의 확장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의 핵심지를 종가와 사당 그리고 가장 오래된 택호를 갖는 송화댁으로 가정할 경우, 이 장소를 해발고도의 정점으로 삼아 점차 저지대로, 그리고 점차 주변부로 마을의 사회공간적 구조가 전개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각 택호의 기원 인물을 근거로 가옥의 건립 시기를 추정해 보면 외암마을의 형성과정과 공간구조를 이해하기 용이할 것으로 여겨지는데 가옥의 건립 순서는 송화군수를 지낸 이장현(1779 ~ 1841)에게서 기원하는 송화댁이 가장 이르며, 그 다음으로 병사댁(이용현, 1783 ~ 1865), 건재고택(이상익, 1848 ~ 1897), 교수댁(이용구, 1854 ~ ?), 감찰댁(?), 조실댁(이상덕, 1848 ~ ?), 참봉댁(1859 ~ 1891), 참판댁(이정렬, 1865 ~ 1950) 순이다.

한편, 마을입구로부터 동쪽의 설화산 방향으로 마을을 관통한 안길이 중심도로이므로 이 도로를 중심으로 마을의 공간구조를 읽어볼 수도 있다. 이 경우 안길 중간에 위치한 영암댁(건재고택)을 마을의 핵심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이곳을 기준으로 점차 가옥들이 전후좌우로 확산되었다고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마을 안길을 중심축으로 삼을 경우 확산의 영역은 남쪽으로는 천을 경계로 하였으며, 북쪽으로도 남쪽 방향과 비슷한 거리만큼을 확보하여 마을의 영역으로 하였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마을 안길과 남쪽 천은 마을 배치 구성에 있어서 영역을 확보하고 균형을 갖추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 안길의 북쪽은 상대적으로 고도가 높으므로 이 일대는 설화산으로부터 내려오는 계류의 범람을 피할 수 있다.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주요 반가(班家)들은 대부분 마을 안길의 북쪽에 위치한다. 마을 안길의 동쪽 끝이 막다른 길처럼 되어 있고 이 일대에 종가와 외암사당, 송화댁, 참판댁 등 최상류층 가옥이 분포하고 있는 사실 등은 이 지점이 마을의 심층부임을 알려준다. 안길을 기준으로 그 남쪽의 저지대는 일반 민가와 아직 택지화되지 않은 경지, 그리고 상여집이 분포한다. 이 점에서 보면 이 일대를 마을의 사회공간적 주변부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안길 전체가 사회공간적 ‘경계’ 기능만 한 것은 아니다. 즉 마을 입구로부터 참봉댁 전까지의 구간은 주로 경계선으로 기능한 것이 사실이지만, 참봉댁 이후의 구간은 오히려 종가댁, 송화댁, 참판댁을 연결시켜주는 ‘네트워크’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외암마을의 공간구조는 마을의 권력 관계가 해발고도의 차이에 상응하며 전개되고 있는 한편, 사회공간적 차이를 반영하면서 공간적 ‘핵심_중심_주변’ 구조로 분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외암마을은 19세기를 지나면서 오늘날 보이는 모습의 기본틀을 갖추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2) 마을의 풍수적 국면과 상징 경관

외암마을과 같은 반촌(班村)들은 거의 예외 없이 경관과 영역의 상징화로 충만된 장소를 형성하고 있으며 마을의 영역화가 풍수의 국면으로 상징화되기도 한다. 고목 · 숲 · 바위 · 들 · 못이나 샘물 등의 자연경관은 물론이거니와 비각 · 가묘 · 누정 · 장승 등의 사회적 경관 요소들이 상징경관을 이룬다. 경관이나 영역의 상징화란 그것들의 의미화이며 동시에 공간의 의미적 분절, 즉 장소화로 이어진다. 여기서 외암마을의 풍수적 국면을 그려보고자 하는 것 역시 전통적 반촌의 장소성을 떠받치는 상징적 의미 구성을 밝혀내기 위함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팔도총론(八道總論) 중 외암마을의 뒤쪽에 위치한 설화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부분을 살펴보면 “차령에서 서쪽으로 뻗어나간 줄기가 북으로 떨어져 광덕산이 되고, 또 뻗어서 설라산(雪羅山, 설화산)이 되어 온양 동쪽에 위치한다. 이 산은 하늘에 높이 솟아 그 모양이 우뚝 솟은 홀(笏)과 비슷하다. 이 산을 ‘동남쪽에 있는 길방(吉方)’이라 하는 까닭은 아산, 온양의 여러 마을에서 학문에 현달한 선비들이 많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중환은 비록 외암마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설화산이 갖는 당대의 풍수적 관념을 충분히 드러내 주고 있다. 외암마을의 풍수 형국에 대해 좀 더 직접적으로 정리된 것은 20세기에 들어 풍수학자 장익호에 의해서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유산록(遊山錄)』에서 ‘광덕산의 여러 갈래 중 설화산만이 진룡(眞龍)인데 그 수려함이 일품이며 이 설화산 밑에 삼남대지(三南大地)로 꼽히는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의 미혈(美穴)이 있다’고 하였다. 1974년의 『한국지명총람』에도 ‘설화산은 문필산봉(文筆山峯)이어서 이 산 밑에서는 학자가 많이 난다’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주민들은 그 대표자로 외암 이간과 설화산 너머의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1360 ~ 1438)을 거론한다. 이와 같은 기록들에서 설화산이 외암리의 풍수적 주산(主山)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설화산과 외암마을의 관계 속에서 자연히 설화산과 외암 이간 선생 묘소 사이의 능선부는 마을의 우백호로, 마을 남쪽 열성지기들의 능선부는 좌청룡으로 각각 간주할 수 있다.

다음으로 물[水]을 살펴보면 외암마을의 내수(內水)는 두 곳에서 온다. 하나는 설화산에서 발원하여 마을 남쪽 경계를 따라 지나가는 물이고, 다른 하나는 광덕산 계곡에서 발원하여 이간 선생의 강학처였던 강당골을 지난 후 마을 앞을 통과하는 반계(磐溪)를 말한다. 이 두 줄기의 물은 마을 입구에서 합수된 후[내수구], 북서쪽으로 흘러 역말을 지나는 동안 송악저수지로부터 내려온 근대골내[온양천]와 합류된다[외수구]. 즉 외암마을은 풍수적으로 내수구(內水口)와 외수구(外水口)를 온전히 갖춘 명당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마을입구의 소나무숲은 방풍림으로서뿐만 아니라 풍수적으로 수구막이로서 의미를 갖게 되고 주민들은 수구의 범람이나 액운을 차단하려는 의도에서 이 장소를 장승 건립의 적소로 인지하게 된다. 매년 음력 정월 14일을 제일(祭日)로 하는 외암마을 장승제는 이러한 의식에서 연유한다.

다시 정리해 보면 풍수적인 면에서 외암마을이 갖는 영역성은 주산, 좌청룡, 우백호, 내수구를 연결하는 범위에서 결정되고 있다. 자연마을 단위로는 외암골과 설화리 두 마을 모두 이 영역 안에 포함된다. 특히 마을입구의 소나무숲과 장승이라는 경관 요소는 내수구에 더하여 이 장소가 외암마을의 풍수적 영역의 입구임을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하여 형태적으로 외부 세계에 대한 방어기제적 요소로 기능하는 한편,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장승제와 같은 집단적 축제를 연출해 마을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을의 시작을 알게 하고 진입로로서의 통과의례적인 장소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 점은 반촌으로서의 외암마을이 영역성 및 경계에 매우 민감함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